로넬 차크마 나니(이나니) 씨는 방글라데시 치타공 힐트랙스 지역의 소수민족 줌머인입니다. 소수민족 인권 활동을 하다 탄압을 피해 한국에 왔고, 2002년에 난민 인정을 받은 뒤 지금은 한국 국적을 취득해 김포에서 이주민 정착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재한줌머인연대 활동을 이어 오며 “줌머인이면서 한국인, 한국인이면서 줌머인”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글은 MAP 난민뉴스가 2024년 11월 30일에 진행한 인터뷰를 질문과 답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답은 이나니 씨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겼고, 길이 때문에 일부를 줄였습니다.

한국에 오기까지

한국에 어떻게 오게 되셨는지부터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한국에는 처음에 1993년에 왔고요. 그때는 제가 먼저 인도에 갔어요. 소수민족 인권 활동하다가 체포되어서 3년간 재판을 무죄로 풀려났어요. 그 후에 계획을 마치고 인도에 갔어요. 인도에서 태국, 필리핀 여러 나라 거쳐서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그때 줌머분들은 아시다시피 방글라데시 소수민족인데, 원래 13개의 민족이 통합하면서 지금은 11개로 통합이 되었어요. 특히 치타공힐트랙 지역에서 언어, 문화, 종교, 정치에 있어 다른 정체성이 있었어요. 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저 혼자만 그런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랬어요. 인도 트리프라 지역에서도 6만 5천명 정도 난민이 있었고, 그 당시에 여러 나라에 피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저도 그 중에 1명으로 사실상 망명으로 한국에 94년 초에 왔어요. 제가 98년에 방글라데시 정부와 정당 사이에 97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서 다시 돌아갔어요.

그러면 98년부터 한국에 쭉 계신 건가요?

아니요. 한국은 2000년에 다시 왔어요. 평화협정 시행이 안되어서 전체적으로 상황과 인권 상황이 변화가 없었거든요. 그때 한국에 온 후로 계속 한국에 있었어요.

난민 인정까지

처음 한국에 정착하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2000년대 부터 말하자면 2001년에는 난민 신청했어요. 그 당시에는 불법체류자가 많았어요. 대부분 미등록 체류자라고 볼 수 있죠. 고용비자 제도도 없었고 그때는 산업연수생 제도가 있었는데 약간 한정적으로 운영됐죠. 그때는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다름없이 살았죠. 휴가가 없고, 불법노동을 하고, 다양한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 못받고 정당한 대우를 못받고 노동자와 다름없이 살았어요.

2002년에 난민 인정을 받았어요. 난민 인정을 받기 전 과정은 가장 어렵죠. 난민 법도 없었고, 예전부터 출입국에서 관리를 했지만 그때는 출입국도 엄격했죠. 여러가지 난민 신청자에 대한 다양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데 난민신청하고 나서 다양한 좋은 제도들이 만들어졌잖아요. 없는 것 보다 좋은, 나쁜 것 중에 좋은 것이죠. 알바를 하면 출입국에 알려야 하는데 출입국에 알리면 사업장에 오히려 난민신청자는 일하면 안된다 했었어요. 출입국 입장도 이해돼요. 노동허가가 없으니까 그때는 어려운 상황이었죠.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 난민 신청자들은 같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난민 인정되고 나서는 다 합법적으로 일도 하고, 합법적으로 취업도 할 수 있었고 그런 변화가 있었어요.

난민법이 만들어지고 10년이 넘었는데, 그사이 변화가 있었다고 보시나요?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없고, 그런데 법은 변화가 있었는데 사람들 마음은 변화가 되지 않았어요. 일반 시민이라던가 기관 직원이라던가 크게 바뀌지 않았어요.

치타공 힐트랙스의 어린 시절

치타공 힐트랙스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방글라데시가 1971년에 탄생했고 그 이후 상황은 제가 많이 설명했는데, 줌머분들의 인권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정부가 군대를 배치하고, 그래서 인정받지 못해서 줌머분들이 정당 만들었고 무장투쟁에 들어갔죠. 그때는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제가 직접 경험했죠. 군인들이 마을마다 습격하고 마을 사람들 때리고 정착민들도 벵갈족, 이주민들도 토지라던가 상가라던가 빼앗기고 그걸 직접 봤죠.

제가 초등학생 시절,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또 달랐죠. 대기근 때도 사람들이 많이 사망했어요. 산악지역인 힐트랙은 영향이 많이 없었어요. 나무에서 과일도 열리고 산마같은 것도 많았고 기근의 영향이 있어서 산에 가면 마를 판 구멍이 많다. 이런 노래가 있을만큼 그런 시절이 있었고 사람들이 그때는 마를 먹고 살았다는 그런 얘기예요.

그런 일도 있는 반면에 재밌는 시간도 많았죠. 한국 옛날 드라마를 보면 그때 기억이 많이 나는데, 그때 평화로웠죠. 평화로운 시절이었는데 학교 끝나고 산에 가면 간식이 많았죠. 나라가 덥잖아요. 4-5시가 되면 시원해져요. 그때부터 다양한 전통놀이를 밤까지 해요. 어느 순간부터 그게 없어졌어요. 군인들이 밤에 마을 다니면서 습격하고 벵갈족 이주자들 마을에 습격하고 그런 일들로 어느 순간에 평화로움이 없어졌어요. 점점 상황이 나쁘게 변하는게 느껴졌어요. 그런 상황이 벌어지다보니까 가족도 흩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고,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어요.

이 내용과 그동안 활동했던 것으로 투쟁하는 정당이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가입하고 활동하다가 군대에 체포가 되었어요. 이러한 내용은 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책에 썼는데 그렇기 때문에 책이 많이 안 팔린거 같아요. 왜냐면 한국에 책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것은 난민이 아니라 난민의 전단계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왜 난민이 되었는지를 궁금해하지 않아요. 저는 반대로 난민보다 활동가였고, 줌머였고, 소수자였고, 피해자였다. 이런걸 썼는데 독자들과 제 생각은 달랐죠.

도와주는 마음과 함께하는 마음

한국 사회는 어렵다고 하면 관심을 가져 주지만, 함께 살자고 하면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도 변할 수 있을까요?

다는 아니지만 그게 변화의 과정인거 같아요. 제가 이주민으로 또 난민으로 26년 정도를 살아왔는데,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 없어요. 만난 사람들 다 옹호적이었어요. ‘우리 나라 찾아왔는데 도와줘야지. 함께 해야지, 외국인들 어려운데 도와줘야지.’ 그런데 실제 행동으로 옮기진 않는 것 같아요. 결혼 이민자, 외국인을 보면 사회에서는 가난하고 어렵고 지원 대상의 계층으로 보잖아요. 그것이 편견이죠. 도와주는 마음은 잘 되어있는데 함께하는 마음은 많이 부족하죠.

책에서 ‘말레야(maleya)‘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삶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나요?

그게 차크마족 용어인데요. 다른 민족에도 있을 것 같아요. 한국에는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문화가 있잖아요. 그게 maleya인데 maleya와 차이는 부자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도 약하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게 차이예요.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죠. 나만 도와주는게 아니라 당신도 나를 도와주세요. 그런 문화예요.

우리 시절에 그런게 있었어요. 태풍으로 인해서 대나무로 만든 집이 무너진 적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와서 다같이 하루 만에 집을 고쳤어요. 이런식으로 하루 만에 수확을 해야할 때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가서 한 번에 끝낸거예요. 부자집도 마찬가지에요. 낼 태풍오니까 반나절만에 끝내야해요. 밥만 주면 돼요. 이게 maleya 관습이예요.

요즘에도 그 문화가 어느 정도 남아있어요. 한국에 있는 줌머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누군가 아플 때 바로 모금해서 한달 월급이 금방 모여요. 만원 이만원씩 모아도 사람이 많아서 금방 모금해요. 누군가 일자리가 없는데 일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누구 자녀가 어디서 뭘 할건데 도와주고 이런 관습들이 진행되고 있어요. 처음에는 줌머인이 한국에 10명 밖에 없었어요. 그때가 진짜 maleya 였죠. 서울에 행사가 있어서 가야하는데, 일이 안 끝나면 서로 와서 도와주고 그랬어요. 저녁에 다녀와서 술 한 잔 사주면 되니까.

재한줌머인연대

재한줌머인연대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전에는 방글라데시 선주민 불교연합이었어요. 불교연합은 97년에 만들어졌는데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함이었어요. 그때 이미 호주, 캐나다 많은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활동으로 한국에서도 줌머인의 활동을 알리는 활동이었죠. 97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98년에 대부분 활동가들이 귀국했어요. 그때 몇명 남아있던 활동가들이 단체를 유지했죠. 평화협정이 시행 안되어서 문제가 되니까 다시 만나서 불교연합을 부활시킴으로써 재한줌머인연대를 만들게 된거죠.

저희는 특히 정치적 활동보다 문화적 활동을 하다보니까 한국 시민사회와 연대를 이뤄낼 수 있었어요. 매년 4월에 축제하고 그 사이에 정치적 행동도 했어요. 학술대회라던가 이슈별 토론회라던가 그런 일을 해서 한국사회와 협력을 하게 되었고, 현재는 한국의 줌머분 인구가 늘었고 저희 역량도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죠. 10년 전에는 외국인 활동가들에게 조력받지 않고 활동했다면 지금은 직접 주최하고 활동하고, 자녀교육이라거나 내부적인 문제 해결, 개개인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라던가, 직접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연대는 무엇인가요?

연대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함께 하자는 말이지만 사실 우리가 어떤 목적에 있어서 달성하고자 목적에 대해 공감하고 동참하고 행동하는 것이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연대, 정치적 연대, 종교적 연대일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어떻게 서로 돕고 계신가요?

서로서로 어려움이 발생할 때 도움을 요청하고, 조력을 해주고 그렇게 하고 있죠. 현재 한국에 난민신청자가 있고, 난민 인정자가 있고, 국적 취득자가 있어요. 신청자 같은 경우에 여러 가지 조건이 안되어서 취업활동을 할 수 없고 경제적 어려움이 있고, 누군가 아플 때 연대해서 책임지고 함께 해결하죠. 인정자 같은 경우에는 난민 인정이 되면 어느정도 자유로워지고 독립성이 어느정도 생겨요. 한국사회에 적응할 때 문제가 많이 발생해요. 매일매일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은데 이런 문제들이 줌머연대 안에서 보통 해결돼요. 국적 취득자 같은 경우에는 법적으로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도 갖춰지고 그래도 일반 국민들처럼 발생하는 문제가 많죠. 이러한 문제를 풀어가는 문화가 자리잡은거 같아요.

줌머인이면서 한국인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끼리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를 벗어나야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라는게 줌머사회를 말해요. 희망도 있는 반면에 두려움도 있어요. 희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 되어버리니까 한국 사회에서 직접 한국인으로서 자유롭고 직접 다할 수 있는데, 원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소수민족, 문화, 다양한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 지켜나가고 있는가? 이러한 이슈들이 나오죠. 제가 그동안 해왔던 말은 우린 줌머인이면서도 한국인, 한국인이면서도 줌머인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데 상황에 따라 걸림돌이 많아요.

선생님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살아가지만 줌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 제 목표인데,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게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왜냐면 우리 애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예전에는 아이들이 별로 없을 때 한 두명만 있을 때 자신감이 없었어요. 우리 아들 때는 자녀 1명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갈 때 한국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어요. 누군가 외국인이라고 알게 될까봐 전통의상도 입지 않았어요. 지금 아이들은 달라요. 행사 때마다 자신있게 입는 모습을 보여요. 외국인이면 뭐 어때? 하고 말로 표현하진 않지만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희망이 됩니다.

김포에서 하는 일

김포시외국인주민센터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김포시에서 운영하는 건데요. 등록 외국인만 2만4천명 정도 다해서 3만명 정도 될거에요. 기업도시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많아요. 결혼 이민자도 적지 않고 사할린 동포 많아요. 난민도 줌머난민만 아니라 다양한 난민들이 있는데, 미얀마 재정착 난민도 많아요. 아프간 특별기여자도 여덟 가정이 있어요. 저희 지역에는 다양한 이주민이 있는데 정착지원 상담을 해요. 노동상담부터 시작해서 이주민, 난민, 특별기여자, 결혼이민자 모든 이주민들이 필요한 사람들에 한해서 각종 상담을 하죠. 출입국의 일은 출입국 가서 협력을 하고 노동부는 노동부와 협력을 하고 형사 문제는 경찰과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일하시면서 언제 보람을 느끼시나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저는 변호사도 경찰도 아니다보니 쉽지 않죠. 어려운 상황에서도 보통 문제는 해결돼요. 한국도 예전같지 않아요. 문제는 어렵지만 보통 해결되기에 보람이 됩니다. 제도적으로 보호가 되니까요. 그래도 어느 기관을 가면 가끔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외국인인데 이런 부분 알까? 하는 편견들이 있지만 그래도 해결 됩니다. 말을 잘 못해도 그래도 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용기 있게 살아가야 해요.

귀화 전과 후에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외국인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내국인 신분으로 할 수 있는게 달라요. 귀화가 되었다고 경제적으로 지원받고 그런게 아니잖아요. 귀화가 되었다고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똑같고 다른 점은 할 수 있는게 많아요. 개인적으로 관심사가 사회참여인데 사회참여에 법적인 제한이 없죠. 제가 몇 가지 직책을 맡았는데 출입국의 사회통합 자원봉사 위원으로 활동했어요. 현재 경기도 이주민 지원시책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로 2012년에 장교로 임관 했는데 외국인 신분은 안돼요.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면 물론 국가에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한정되어 있어요. 국민으로서 국가를 위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거죠.

난민이 한국 사회에 참여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특별한 준비가 필요할까요? 성실하게 살아가면 되는거 아닌가요? 열심히 일하고, 배우고, 법을 준수하고 한국사람들도 그 정도를 준비하면 되는거 아닌가요.

좋아하는 한국어

좋아하는 한국어 문장이나 단어가 있을까요?

딱 두가지인데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어요. 감사하는 마음, 한 사람의 책임, 성실성이 담겨 있고 죄송합니다 라는 말에는 잘못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어요. 이 두가지만 잘 되어있으면 어딜 가든지 인정받을 수 있어요.

한국에 사는 이주민과 난민에게

인터뷰를 마치고 MAP 난민뉴스 인터뷰어와 함께 선 로넬 차크마 나니 씨.

한국에 사는 이주민, 난민 분들께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사실은 이주민들은 한국에 사시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잖아요. 한국에는 또 모든 것이 잘 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해결되게 되어있어요. 항상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